사유의 칼. 시대의 질문. 도마의 요리사

호모 프롬프트


[도마 1호 ‘쇼츠’ 모티프 이미지] 이 작업은 생성형 AI Firefly를 이용하여 총 100개의 질문과 요청이 담긴 텍스트를 이미지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오브제를 배치하고 질감과 스타일 효과를 설정하며 구도를 만들었다.


다음은 작업을 위해 사용된 단어들이다. 잘린 카메라 렌즈, 무채색의, 디스토피아, 도마, 산산조각 난, 텅 빈, 말풍선, 균열,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마우스 커서, 좋아요, 파편화, 이목구비가 없는, 목각인형, 찢어진 종이, 뒤섞이는, 가로막힌, 물음표, 유리로 만든, 구멍 난, 책, 얼음, 녹아 흐르는, 생각의 끈이 잘린, 목을 맨, 영상들.

인간의 판단으로 395장이 버려지고 5장은 저장되어 남았다.

© PARANPEE
© PARANPEE

6시간 29분. 하루에 깨어 있는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시간이다. 화면 깨우기는 총 146번, 알림은 평균 233개가 날아들었다. 이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대체로 사람들과 메시지를 나누거나 어떤 이미지나 영상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집중했을 것이다. 분명 할 일이 쌓여 있는 상황이었을지라도. 잠시 동안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믿으며 디지털 세계로 도피하고 또 현실의 문제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둔다.

현대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 혹은 공백의 상태를 견디기 어렵다. 커피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커피만 마시기, 지하철이나 비행기 안에서 미디어 없이 시간 보내기, 명상하기 같은 행위들이 대단한 ‘광인’의 기개처럼 여겨진다. 그러한 ‘없음’의 상태를 버티지 못해 궁극적으로 생각 없음의 상태가 되어버린 미디어의 몸들은, 텍스트를 경유하여 스스로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를 눈꺼풀로 사진 찍듯 캡쳐하고, 가볍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그렇게 무수히 쌓인 이미지들은 데이터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과잉 소비, 음식물 쓰레기, 패스트 패션, 일회용품, 스팸 메일함이 만들어내는 기후위기 또한 사유 없음의 증거다. 우리의 상상력은 깜빡이는 전자파 앞에 가로막혀 제한된다. 쓰지 않는 사유의 근육들은 힘을 잃고 녹은 치즈처럼 흐물흐물해진다.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는 지혜롭게 질문하는 사람이다.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Homo’와 사용자의 지시, 명령어를 뜻하는 ‘프롬프트Promptus’를 합친 단어로, AI 등의 신기술을 능란하게 부리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신조어이다. 미디어 시대의 도래로 롱 폼Long-form이 사라지고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사유가 희미해지고 있지만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만이 머무를 수 있는 고유한 자리가 있을 것이다. 쏟아지는 정보를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그 속에서 진실과 진리를 발견할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연하다 여기는 일에 물음표를 던지며 다가올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 텅 빈 말풍선 속에 반짝이는 질문들이 가득해지도록.


 얼마 전, 업무 차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고전을 새롭게 감각해보는 기회였다. 우리 내면에 자리한 고독과 두려움에 손을 가만히 얹어주는, 세계를 이루는 근간과 본질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마치 시인의 언어처럼. 그런 어린 왕자를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주의 철학으로 바라보았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질문들 속에 느긋하게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발들이 보인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가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현존재란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독일어로 ‘거기Da 있음sein’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지니고, 한자로는 ‘나타날 현現’으로서, 존재가 드러나는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존재이다. 누군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문제를 삼고, 의미를 찾는 것처럼.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무런 사유를 하지 않는 ‘있음’ 그 자체의 인간은 ‘존재자’라고 부른다. 존재자는 이외에도 자연, 그 밖의 모든 사물,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자인 인간을 현존재라 명명한다. 우리가 자신의 심지를 가진 현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존재의 본질이 바로 ‘실존Existentz’이다. 이때의 실존성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그 중 특히 살펴볼 지점은 ‘세계-내-존재Das in-der-Welt-sein des Dasein’이다. 인간은 세계와 분리되어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주변 환경,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 관계들이 우리의 정체성과 의미를 형성한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는 우선 나를 둘러싼 세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린왕자가 우주여행을 하며 두 번째로 들렀던 별은 허영쟁이가 사는 별이었다. 그는 끝없이 칭찬받고 찬양받길 원하는 어른이다. 자신이 가진 커다란 결핍을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채우고,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이 존재의 이유이자 의미가 된다. 현대인으로서의 현존재는 평균화되고 고유성을 잃으며, 몰개성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가령 SNS와 미디어의 발달로 끊임없이 타자와 나를 비교 선상에 두거나, 다수가 살아가는, 혹은 트렌디하다 여겨지는 방식대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불안에서 헤어날 수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Angst은, 우리가 삶에서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고 느끼는 기분,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 영혼이 충만하지 않고 공허한 기분에 가깝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비본래적’인 삶이라 했다. 우리가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본래적인 삶, 즉 오로지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어린왕자는 우주여행을 하며 다양한 어른들과 만나면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m Sinn von Sein이 은유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권위에 집착하는 늙은 왕, 인정욕구에 목마른 채 오직 자신을 찬양하길 바라는 허영쟁이, 부끄러운 일을 잊고 싶은 술꾼, 끊임없이 별을 세고 자신의 몫을 챙기는 사업가, 쉬지 않고 불을 켜고 끄는 일을 하느라 푹 자보는 게 소원인 점등인, 꽃을 덧없게 여기는 지리학자…… 앞서 살펴본 비본래적 실존의 양상들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와 이미지 속에서 허덕인다. SNS 속에는 티끌 없는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 성과와 결괏값만 남은 이미지들이 나란히 전시된다. 한병철 저『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에 따르면,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빠르게 퍼지는 사회는 과도한 투명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투명성이 신뢰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불신사회에 살기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한다. 이는 즉, 통제사회로 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사회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성과사회로 다다른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위해 최대성과를 올리려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대하고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분리가 없어진다. 이처럼 나의 성과와 가능성, 상품성을 드러내야 하는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카메라 렌즈 앞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사진은 기념과 회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발터 베냐민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적하듯, 사진에서 전시 가치가 예식 가치를 밀어낸다. 사람들은 존재하려면 전시되어야만 하고, 상품처럼 행동하며, 자기 자신을 생산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자연스레 세계는 비대한 자아의 아름다운 배경으로 위치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물질적이고 표면적인 가치에 매몰되며 ‘나’의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Ce qui est important, ça ne se voit pas… »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다가서려는 역설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나 사막이 숨겨놓은 오아시스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좁아지고 납작해진 세계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은폐와 비은폐Verborgenheit und Unverborgenheit des Seins’에서 비은폐는 존재가 드러나는 상태로, 우리의 이해와 경험 속에서 명확하고 밝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는 또한 진리와도 관련이 있는데, 나와 타인이 선명하게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존재할 때, 우리는 서로 진실하고 투명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은폐는 존재가 숨겨지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가 기술과 물질적 가치가 우선시되면서 존재가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본질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관계를 맺기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가시적인 것, 표상,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유와 사고는 눈에 보이는 것 외로 확장되지 못 하고 이미 주어진 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협소한 삶을 산다.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을 때에도, 어떤 ‘직업’으로 표상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