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談論)’은 ‘활활 타오르는 말들’을 뜻합니다. 말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발화자도 중요하고, 수신자도 중요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내용과 말을 실어 나르는 매개도 중요합니다.
현재 담론의 상황은 예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통적으로 말들을 타오르게 했던 발화자 그룹에는 크게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첫째 대학의 강단인문학, 둘째 계간지 필자로 대표되는 지식인담론, 그리고 저널리즘입니다. 그러나 대중 담론 영역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이제 사실상 미미합니다. 강단인문학은 학술담론 영역으로 완전히 축소되었고, 지식인담론은 출판사의 상징자본 영역을 겨우 담당하며 역시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준 있는 저널리즘 비평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담론 매체는 전통적 문자매체에서 다양한 일인 미디어로 교체되었으며, 특히 그 공간을 채우며 대중과 대화하고 있는 이들은 ‘유튜버 크리에이터’입니다. 근 10여 년 간 이루어진 이 상황만큼이나 지식 담론의 역사에서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이런 지식 담론 상황을 정보민주화라는 차원에서 환호할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쇼츠와 틱톡과 릴스에 정신과 시간을 빼앗겨버린 ‘대중사회’에서 사유하는 긴 문장은 짧고 즉흥적인 말들로 바뀌고, 지식은 정보로 대체되었으며, 급기야 짧은 말들조차 ‘자본화 된 바디’에 포커스를 맞춘 시각 콘텐츠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변화된 메시지 현상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질문’의 상실입니다.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대중적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기계발서’ 출판시장이 이를 증명합니다. 자기계발 열풍 시대의 지식-정보 담론들은 대체로 사회가 묻는 질문을 의심 없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능한 빨리 가성비 높은 대답을 찾아내고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합니다. 메시지의 수신자인 개인들은 이를 내면화 합니다. 자기계발 담론은 이제 이 시대의 신념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확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데카르트의 철저한 의심을 근대인의 ‘근본기분’이라고 비판조로 얘기했지만, 기술적 특이점에 관한 묵시록과 알고리즘경제 미디어에 갇힌 우리에게 데카르트적 의심의 훈련 경로가 상실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는 군중 확증편향의 시대입니다.
도마는 이 시대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그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그 질문들을 비평적 말의 ‘도마’ 위에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질문의 재설정ㆍ재규정ㆍ재검토입니다. 도마 위에 놓인 대상이 칼로 썰리지만 몸으로 들어와 우리를 살리는 음식이 되듯이, 질문을 통해 영감을 자극하는 신선한 이야기거리가 생성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편집동인의 이름이자 대화의 매체가 될 ‘도마’를 ‘도그마(dogma)’의 준말로 새기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 상상력의 영토를 제한하는 일방통행적 사고, 확증편향, 관행적으로 유통되는 도그마적 발화ㆍ메시지를 의심하고 절단하는 논쟁적 대화와 생각을 제안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도마를 기독교 바이블의 도마(Thomas)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도마는 수난을 겪고 부활한 예수의 존재를 믿지 못하여 만신창이가 된 예수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서야 그를 믿습니다. 만져보고서야 믿는 그는 ‘팩트’에 충실하지만 ‘믿음’을 가진 존재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인 동시에 경험적이지만, 우리가 더 큰 진리, 다른 차원의 궁극적 신비와 만나기 위해서는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영성적 퀀텀 점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진리를 위한 도약에는 합리적 예측가능성을 뛰어넘는 존재론적 도약이 필요 합니다. 실용적 세속화 예찬 너머를 예감하는 시적 영감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이 시대, 이 시점에 갖게 된 질문들을 생각의 재료로 올리는 ‘도마’를 발명하여, 삶을 살리는 ‘담론’으로 요리하고 세상으로 이 담론을 실어나르는 작지만 생명력 있는 말의 터전이 되고자 합니다.
― 생각동인 도마 발기인
강혜빈, 김경화, 노재윤, 박상수, 송승환,
신수형, 신영선, 조병영, 함돈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