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칼. 시대의 질문. 도마의 요리사.

20대 남성과 ‘함께 살아가기’는 과연 가능할까?

1. 20대 남자, 탄핵 정국의 낮은 참여율

탄핵 정국을 통과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키워드 중 하나는 ‘20대 여성’이었다. BBC 기사에 따르면 탄핵을 요구하는 12월 7일 여의도 집회 전체 참가자 20만 여 명(추산) 중 20대 여성이 약 17.7%를 차지해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였다. 1「’탄핵 집회’, 20대 여성 가장 많고 20대 남성은 가장 적었다 이유가…」, BBC NEWS 코리아, (출처: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159vendkl8o) 언론들은 당장 20대 여성에 주목하거나 이들이 들고나온 응원봉에 관심을 가지며 젠더와 세대론을 결합한 다양한 조명 기사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당시에도 20대 여성은 늘 가장 높은 비율로 참석해왔음을 떠올린다면2「 20대 여성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23.8%),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19.3%)에서 이미 가장 높은 참여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위의 기사, 참조. 탄핵 정국에서 새롭게 이들을 발견한 것인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무지하거나 매우 섣부른 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응원봉’으로 집단을 대상화하거나 과거의 ‘빠순이’ 정도로 이해하면 이들의 목소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기특하다며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말에도 충분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3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의 말. 박성동, 「탄핵집회 모인 42만명 중 3분의 1 ‘2030 여성’」, 한국기자협회보, 2024.12.19.(출처: 한국기자협회, https://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7371 ) 이미 20대, 더 나아가 2030세대 여성들은 상당 기간 자기 세대의 의제를 시대적 과제와 결합하여 조직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면서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양한 승리의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남성들’이고 좁혀서 ‘20대 남성’이다. 20대 남성의 경우, 앞선 12월 7일 여의도 탄핵 촉구 집회에서 3.3%로 가장 낮은 참여율을 보였던 10대 남성(2.5%)과 엇비슷한 참여율을 보인 정도였다. 탄핵 집회에 적극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포착되는 일부 청년 남성들의 모습은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혐오 발언을 일삼거나 응원봉을 흔들며 거리 행진을 하는 여성들에게 “페미년들”이라고 히죽거리는 ‘졸렬한 존재들’4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의 말. 박성동, 「탄핵집회 모인 42만명 중 3분의 1 ‘2030 여성’」, 한국기자협회보, 2024.12.19.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s://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7371) 정도에 그치고 있는 형편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당시 20대 남성 참여율이 12.3%로 전체 남성 참가자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던 점을 떠올린다면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16년과 2024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20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도 부족한데, ‘또 남자 이야기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집회 참여율이 낮았던 20대 남성도 여성과 비교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민주시민으로 견인해야 할지 고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5앞의 기사, 권순택의 말.는 점을 떠올려보자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2. ‘마이너리티 정체성’과 ‘과격한 남성’의 등장

어느덧 벌써 육 년이나 지난 이야기가 되었지만, 시사인 천관율 기자와 리서치 디자이너 정한울이 함께 쓴 『20대 남자』(2019)에서 20대 남성의 새로운 특징으로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주목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대단위 웹 설문 조사 응답에 기반한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20대 남성이 다른 세대에 비해 특별히 더 ‘보수화’되었다거나, 아니면 ‘여성혐오’의 성향이 폭넓게 퍼져있다는 등의 가설이 실제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20대 남성의 특징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을까?

핵심은 바로 ‘20대 남성들이 스스로를 ‘약자’이고, 권력이 남성을 차별하기 때문에 남성 차별을 겪고 있다고 인식한다’는 점에 있었다. 실제 현실의 많은 지표를 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남성 우위의 사회임이 분명하지만 20대 남성들에게 그것은 기성세대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일 뿐이다. 20대 남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차별받는 일은 이제 거의 없으며 오히려 20대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20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주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맞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여성혐오’에 기반한다기보다는 ‘공정’과 연관된 맥락에서 ‘(실제와 상관없이) 무임승차자(여성)에 대한 분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마이너리티 남성 정체성’이 어떻게 발생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부제를 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를 보다 당사자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K를 생각한다』(2021)를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 자신이 94년생인 저자 임명묵은 90년대생이 사춘기를 거쳐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접하는 2000년대와 2010년대가 일종의 ‘계층화’가 더욱 공고화되는 시기임에 주목한다. 60년대생 부모들의 사회적 자본 축적과 학벌 재생산에 대한 투자, 경제적 성공 여부에 따라서 세습을 통해 그 자녀 세대인 90년대생의 계층화가 잠정적으로 완결되었다고 보면서 이를 현상적인 측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2010년을 전후로 유행한 ‘헬조선론’, ‘수저계급론’,‘죽창론’등의 용어였다고 그는 판단한다. 결국 일종의 이중경제체제로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교육과 일자리의 미스매치, 하강하는 경제 상황 속에서 중상류층은 중상류층대로 제한된 ‘지위경쟁의 압력’이 높아지고, 중산층과 하층 계급 또한 경제적 비관과 격차에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제조업 일자리의 축소, 장기 불황, 정규직이 질 낮은 비정규직으로 대체되는 현실, 불확실한 미래, 대학 졸업장을 가졌지만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더욱 격화된 경쟁 압력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 등 경제 현실을 20대의 불안과 연결시키는 분석은 이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 책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이러한 변화에 더하여, 임명묵이 주목하는 제2의 현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바로 ‘온라인 공간’이다. “90년대생들이 구별되는 점은, 대체로 2000년대에 이미 틀이 완성된 온라인 문화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접했다는 것”이며 2010년을 전후로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스마트폰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사실상 완전히 허물었다”고 할만한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야말로 “90년대생은 인격적 완성을 이루기 전인 청소년기부터 이런 강력한 무기에 노출된 최초의 세대”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저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실시간 접속이 가능한 스마트폰으로 촉발된 온라인 현실이 ‘지위경쟁의 압력’을 더욱 강화했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SNS에서는 한 분야에서 최고라고 할 만한 강자들을 아주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매분, 매초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실시간으로 동기화된 비교 경쟁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온라인 공간이 ‘주목경제’에 특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우는 온라인상 디지털 정보의 경우 일견 무가치한 정보라도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참여자들의 ‘관심’과‘주목’이다. 하지만 인간의 주목 자원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유지하기 위한 경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콘텐츠들의 자극 강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지며, 그렇지 않은 콘텐츠는 이목을 끄는 데 한계가 있어 금방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극단성과 선정성이 주요한 가치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유사한 콘텐츠를 연속으로 추천하며 ‘에코 챔버(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편향된 서로의 견해를 증폭하는 현상)’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온라인 공간이 현실의 상당부분을 대체하며 온라인 커뮤니티, SNS가 사회적 평판과 인정욕구를 비교적 손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이미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명묵에 따르면 유년기 혹은 청소년기 때부터 스마트폰에 접속하여 활용하기 시작한 90년대생들에게 “SNS에서의 전시를 통한 인정욕구나 네트워크 내 다른 사용자와 벌이는 인정 경쟁에서의 승리”를 충족하는 일은 자기 정체성과 자아 존중감 형성에 중요한 과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관계맺기가 온라인 공간의 관계맺기로 변함에 따라 끊임없이 타인과 실시간으로 자신을 비교하고, 여기에서 오는 불행감의 증대를 겪으며 “주관적인 불행감” 이 계속해서 커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즉, 지금 이곳의 악화하는 현실 경쟁과 온라인 현실의 실시간 경쟁이라는 이중체제가 90년대생 청년들의 ‘현실감각’을 더욱 고단하게 만든 원인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결국 중첩된 ‘지위경쟁의 압력’ 때문에 이전 세대에 비해 더욱 큰 좌절과 결핍을 느낀 90년대생들이 내재된 폭력성을 ‘온라인 사회운동’으로 충족하려했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 하다. 저자에 따르면 “온라인의 안티 페미니스트들은 586의 시혜적 정책과 여성 단체의 사회적 헤게모니가 맞물려 20대 남성을 탄압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성은 ‘약자 혹은 소수자’일 뿐만 아니라 ‘탄압받는 피해자’가 되었다. 이는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파편적 정보를 선택적으로 과해석하여 20대 남성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각본’이지만 앞선 장에서 ‘남성 마이너리티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문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무언가에 분노한 소수가 어떤 식으로든 결집하여 여론을 만들어내고, 그 극단적인 여론은 대중적 커뮤니티로 흘러들어가 갈등을 재생산하는 연료”가 된다는 점에 있다. 결과적으로 “90년대생의 남녀 갈등의 경우, 이런 갈등이 가깝게는 5년, 길게는 10년에 걸쳐 누적된 결과 대중적 커뮤니티에서 온건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을 정도”로 극단화되어버린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급진의 20대』를 쓴 김내훈은 이를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아니라 ‘20대 남성의 과격화’로 명명한다. 20대 남성들이 각종 사안을 평가할 때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공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해열제’이자 ‘텅 빈 기표’로 작동한다. 즉 오늘날 ‘공정’은 일종의 절대적인 무기가 되었고 김내훈에 따르면, “모든 사안에 관련한 건전한 토론과 숙의를 차단하고 ‘그들’의 배제와 ‘우리’의 투쟁을 성역화하는 데만 쓰인다. 알맹이가 없는 기표로서 공정은 그 자체로 말해주는 바가 없고 해석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특정 정치 세력에 전유되기 쉽”게 변질되었다. “특히 반-페미니즘의 층위까지 더해진 20대 남성들은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매너까지 부정해버리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여성을 저주한다. 이들을 가리켜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지나친 선해다. 보수화가 아니라 과격화라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 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3. 젠더 갈등? 정치적 필요에 의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

마침내 지금 20대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젠더갈등’이 되고 말았다. 빅테이터 분석업체 타파크로스가 2016년 1월에서 2019년 6월까지 SNS 와 포털, 커뮤니티 자료 5천 4백만 건을 분석한 결과, 20대 남녀의 온라인 공간 갈등 유형에서 ‘성별갈등’관련 내용이 73.6%로 가장 높았다. 2위를 차지한 정치갈등(15.4%)과 비교해도 성별갈등이 70%대로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청년들의 젠더갈등’은 이제 쉽게 꺼내놓기 힘든 논쟁적 주제가 된지 오래이다. 도저히 그 평행선이 좁혀지지 않기 때문에 아예 대화의 목록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다만 생각해볼 것은 비록 ‘과격화된 20대 남성’이라는 명명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20대 남성에게 이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이다. 왜냐하면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의 극단적이고 과격화된 논의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매개하여 이를 정치적 세력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홍지아는 과격화된 20대 남성에게 촉발된 ‘안티 페미니즘’과 ‘젠더갈등’이 특정 세력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보고 ‘젠더갈등 담론을 생산하고 비판하는 주체들 가운데 정치인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젠더갈등 담론의 본격적인 시작은 2021년 4월이다. 당시 ‘이준석’ 국민의 힘 선대위 뉴미디어 본부장이 ‘급진적 페미니즘으로 역차별 받는 이대남’을 선거 승리의 주역으로 호명하면서부터 젠더 갈등 담론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역차별받는 이대남’의 불만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들의 표를 얻을 것인가가 정치권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며 2021년의 젠더갈등 담론으로 확장된다.” 실제로 2022년 1월, 윤석열 당시 후보가 이준석과의 갈등 후,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한 줄 공약을 SNS에 내걸며 ‘젠더 갈라치기’를 본격화한 뒤로 20대 남성의 31.1%가 윤석열 후보가 더 ‘좋아졌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초박빙’으로 몰고 간 배경에는 20대 남녀의 다른 선택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젠더 갈등의 문제는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우리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의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20대 남성들의 왜곡된 분노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특정 정치인들의 행태와 더불어 홍지아는 보수언론의 매개 역할에 주목한다. 2021년 한 해 동안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기사를 분석한 뒤, (중앙일보가 조금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이들 보수 신문들이 주로 젠더 갈등을 단순 중계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가십성 기사를 내 오히려 젠더갈등의 논란을 키우고, 정작 20대 당사자의 목소리는 담아내지 않으며, 보수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 혹은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수의 담론 주도자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있음을 확인한다. 즉,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역차별 받는 이대남’을 소환한 정치권이 발언권을 점유하고 여혐과 남혐의 선정적 대립구도의 보도에 집중하는 언론보도가 주도하는 젠더갈등 담론”이 악무한의 지경을 펼쳐놓은 것인데, 이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 20대 남성과 여성들이 경험하는 실존적 문제들” 을 오히려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어낸다. 20대 청년들의 당면한 현실 문제들은 ‘에코 챔버’ 속에서 증폭되었던 ‘젠더갈등’ 논란 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 앞서 김내훈이 20대 남성의 ‘공정 감각’이 실은 텅 빈 기표로서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데에 동원되며, 특정 정치 세력에 전유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였음을 기억한다면 사실상 20대 남성의 과격화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목경제가 과격화와 만나 특정 정치인들의 호명 속에서 현실로 이끌려나온 뒤 보수 미디어에의 의해 증폭되는 방식으로 그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파급력을 획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상황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무섭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윤석열의 구속영장 발부에 격분한 극렬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한 뉴스가 실시간 속보로 전해지고 있다. 초유의 ‘사법부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될 이 사건에서 2030 남성들이 선두에 서서 방패를 든 경찰관들을 힘으로 밀어붙이며 쓰러뜨렸으며 현장 난입 혐의로 체포된 46명 중에선 2030세대 남성이 상당수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소화기를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고, 사무실 안 집기를 발로 차며, 경찰과 기자를 고립시켜 폭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4. 20대 청년의‘페미니즘’과 ‘각자도생’

이제 남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20대 남성이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한다면 20대 여성은 어떨까? 어째서 20대 여성은 20대 남성과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경제적 문제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 국면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설득력있는 배경을 『20대 여자』(202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선 『20대 남자』와 짝을 이루며, 『20대 남자』에서 다루지 못한 20대 여성의 문제를 알아보려 기획된 이 책에서 20대 여성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으며 여전한 가부장제와 성차별 때문에 남자에 비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관건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었다. 20대 여성들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접하고 이어서 미투 운동, 탈코르셋 운동, 2018년 혜화역 시위, N번방 사건을 포함한 디지털 성범죄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커다란 사회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이때 20대 여성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기회 부여를 이루려는 운동’이었다. 20대 여성 10명 중 4명(41.7%)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생각했으며 이것은 다른 성별과 다른 연령대의 응답자 평균 20.8%의 2배에 이르는 수치였다. 또한 ‘감정온도(미국 선거 여론 연구에 주로 쓰이는 기준. 사회집단이나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측정함)’를 0(매우 부정적)에서 100(매우 긍정적)으로 잡았을 때 20대 여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느끼는 감정온도는 53.3도였다(전체 평균은 32.1도).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정온도가 가장 낮은 20대 남성(14.3도)와 비교하면 39도나 높은 수치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20대 여성에게 ‘페미니즘’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화하는 각본이자 자신을 타인과 사회 혹은 시대와 접속시키는 중요한 매개 도구였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가 강할수록 현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했고, 젠더 영역에만 문제의식이 머물지 않았으며 분배‧노동‧환경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 대한 비판적 의식 확장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오프라인과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성향이 두드러졌으며,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쓰기도 했다. 약자를 돕기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여성은 17.3%로 전체 평균(10.4%)보다 높았다. 사회구조가 차별을 만든다는 인식은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져 강한 페미니즘의 성향을 지닌 20대 여성 중 75%가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겪는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진다’라고 응답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자면 20대 여성이 주도한 탄핵 집회에서 장애인, 농민,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등 그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무대와 광장을 평등한 공간으로 재구성해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20대 남성의 경우, 부모 세대와 비교했을 때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실망감을 해결할 수 있는 각본으로 ‘왜곡된 능력주의에 기반한 각자도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20대 남성들을 연구한 『급진의 20대』에서 저자는 “연구참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내 코가 석자’라는 마음가짐이다. 개인이 일상과 삶의 각 단계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본다.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내 살림살이의 귀추가 공동체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아닌 자신의 능력과 선택, 운에 달렸다고 본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사람조차 실은 그 도박의 승패와 관련해서만 정치를 ‘관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기술한다. 정치 또한 승패의 도박으로 보고 승자 혹은 강자에 이입하는 방식으로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약자에게 감정이입하는 20대 여성과는 다른 선택이다. 이들에게는 20대 여성들처럼 파편화된 개인을 타자, 사회, 시대와 연결해주는 ‘사회화 도구 혹은 각본’이 부재한다. 오직 어떤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대하는 ‘안티의 정치’만을 추구하며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이를 통해 ‘피해자이자 약한 존재는 바로 나’라는 빈약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때로 과격화로 치닫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방식은 결코 상상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외로움과 박탈감은 커질 것이고 이러한 취약함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은 물론 언제 어느 때에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와 보수 미디어, 정치인들의 호명과 왜곡된 방식으로 결합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20대 남성을 민주 시민이자 동료 시민으로 바꿔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 자신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언제든 실질적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