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칼. 시대의 질문. 도마의 요리사.

응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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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한다. 시간을 응시한다. 응시된 시간은 그 시간만큼 그대로 내게 와서 쌓인다. 한 잎 두 잎 허공으로부터 내려앉는 가을날의 잎새들처럼 한 잎 두 잎 천천히 내게로 내려앉는다. 잃어버린 시간이 조금씩 회복된다. 응시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려고 응시한다. 응시하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응시의 주변으로 잃어버린 시간들이 계속 나타난다. 여기가 그곳인가 기웃거리며 모여든다.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내가 지금 ‘있다’는 것이 잘 느껴진다. 시간은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나를 응시하는 시간의 시선과 시간을 응시하는 나의 시선이 만난다. 만남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회복된다. 뭉쳐 있거나 몰려 있던 시간이 균일하게 흐른다. 나에게 오후가 생긴다.

오후에 컵을 그린다. 좋아하는 도자기컵을 종이에 연필로 그린다. 컵을 그리려고 컵을 응시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컵의 몸체와 갈색 무늬들을 본다. 연회색 몸체에 일정치 않은 패턴으로 그어져 있거나 찍혀 있는 갈색 무늬들의 불규칙을 본다. 컵의 몸체와는 달리 손잡이만 짙은 갈색인 것을 본다. 컵의 모양이나 무늬는 거칠고 소박한 느낌인데 표면의 유약은 매우 투명하고 매끄럽게 입혀져 있는 것을 본다. 그 낯선 어긋남이 내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는 순간을 본다. 존재를 변화시키는 어느 가마 안의 뜨거움과 고요함을 본다. 북적이는 시골 장터에서 이 컵을 향해 뻗었던 내 손을 본다. 그 손이 이윽고 선 하나를.

선은 나아간다. 선의 나아감을 응시한다. 선이 드러낼 형태를 짐작해본다. 짐작이 먼저인지 선이 먼저인지 알지 못한다. 응시할 뿐. 컵을 응시하고 선을 응시하고 나타남을 응시할 뿐. 응시가 돌려주는 시간과 함께 있을 뿐. 시간이 건네줄 소박한 컵을 기다린다. 선은 나아가고 돌고 꺾고 멈췄다가 문득 무수히 쏟아지고. 종이와 연필과 손은 조금씩 컵에 다가가는 것이다. 나는 저 멀리로부터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는 무언가를 본다. 희미한 흔적 같은 것. 그것은 점점 또렷해지며 내게 다가온다. 시간을 응시하는 나의 시선과 나를 응시하는 시간의 시선이 잠시 만났던 또렷한 흔적. 그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개의 컵이었다. 오후가 가고 저녁이 온다.

저녁에 불을 보러 간다.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캠핑장에 간다. 카운터에서 뜨거운 차를 주문하고 마른 장작 한 묶음을 산다. 주문한 차가 나올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작은 박스에 담긴 장작을 본다. 나는 태울 것을 산 것이다. 불을 보려면 태울 것이 있어야 한다. 장작 개비들은 잘 말라 있고 깨끗하다. 공백 없는 나무의 속을 본다. 그 속이 환한 것을 본다. 나는 박스를 들고 야외로 나간다. 격자 모양으로 장작 개비들을 쌓고 그 가운데에 착화제가 담겨 있는 흰 종이컵을 놓아 둔다. 착화제에 성냥불을 그어 붙인다. 불이 시작된다. 불이 시작됐으니 끝날 때까지 타오르겠구나. 종이컵 주변에 격자 모양으로 쌓아둔 장작으로 불은 순식간에 옮겨 붙는다. 불은 경계 없이 타오르고 경계 없이 무너뜨리면서 자꾸 커진다. 나는 뜨거운 일렁임을 본다. 이리저리 허공을 찌르고 가르는 불의 윤곽을 본다. 환한 속을 가진 나무들이 타닥타닥 타오른다. 나무의 시간이라 해야 할까 불의 시간이라 해야 할까. 불과 나무를 응시하자 다시 한 잎 두 잎 시간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그 시간의 잎을 타고 농담같은 생각들이 찾아온다. 저 불을 유령이라 부를 것인가 신이라 부를 것인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면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가. 불은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며 반응일 뿐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묘한 말이다. 유령이 나타난 것일까 신이 나타난 것일까. 신은 유령인가. 무엇에 대한 현상인가. 무엇이 담겨 있는 나타남인가. 불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본다. 겉도 없고 속도 없다. 그저 타오를 뿐. 타오름을 정신없이 들여다본다. 불에 골몰한다. 한 잎 두 잎 내려앉던 시간은 이제 공중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내게 쏟아진다. 시간이 계속 내게 쏟아질 수 있도록 불 속에 마른 장작을 더 넣는다. 나는 시간을 태우는구나. 나는 시간이구나.

속이 환했던 나무들은 다 타버렸다. 잿더미 속에 아직 살아 있는 빛들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을 때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잿더미 속에서 한순간 빨갛게 불이 올라오더니 이내 사그라든다. 그리고 잠잠해진다.

나는 재를 뒤적인다. 가루가 되어버린 뼈처럼 먼지가 피어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