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이 왔다. 머리맡에는 손을 뻗으면 충전 중인 스마트폰이 있다. 이리저리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쥐고 화면을 켠다. 눈이 적응을 하고 나자 즐겨 사용하는 SNS에 가득한 귀여운 동물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순결한 얼굴로 집사들을 농락하고 강아지는 훈훈하게 교감한다. 팬더 곰은 사육사와 포옹을 하고 야생 사막 여우는 어린 왕자도 아닌 인간에게 길이 들어 꼬리를 흔든다.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귀여움도 무궁무진하고 나의 밤은 무궁무진할 것만 같다. 잠깐인 것 같았던 시간이 어느 새 삼십 분, 아니 한 시간이 지난다. 멍해진다. 쇼츠(Short-form video)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불면의 밤에는 시간의 매듭이 사라진다.
#길이_short
쇼츠, 혹은 숏폼이라 불리는 짧은 동영상들은 이제 소수가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누구나, 어느 플랫폼에서나 즐길 수 있는 한입거리 콘텐츠다. 쇼츠는 그 이름 그대로 길이의 짧음이 주된 특징이다. 쇼츠를 발명하다시피 한 SNS 플랫폼 바인(Vine)은 6초의 영상으로 성공을 일구었다. 전세계에 챌린지 열풍을 몰고 온 틱톡(TikTok)은 15에서 60초 사이의 영상 피드를 제공한다. 짧은 비디오 콘텐츠의 형태는 특정 플랫폼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유튜브(YouTube), 인스타그램(Instagram), 페이스북(Facebook) 등 모든 주요한 SNS 채널을 장악했다. 수많은 사용자들이 1분 전후한 영상을 손가락으로 연신 쓸어 올리면서 시간을 쓰게 된 것이다.
짧아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서사가 증발한다. 단숨에 전달할 수 있는 캐릭터의 등장, 캐릭터의 강렬한 어필이 서사의 전부이다. 물론 기존의 긴 길이의 콘텐츠를 짧게 발췌하여 가공하는 영상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원래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 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사건이나 퍼포먼스, 매력이 등장한다. 애초에 기승전결의 전통적 서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영상은 대단한 갈등을 겪기도, 그것의 극적인 해결을 만나기도 힘들다. 서사가 깊이를 갖추는 것은 흐름 때문이다. 각 캐릭터들이 좌절을 겪고 갈등을 만나며 성장을 하고 대면한다. 이 흐름 속에서 캐릭터는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이야기 안에서 출발과 끝의 인물들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 이동이 진전으로 읽히거나 변화로 읽히거나 추락으로 읽히거나 간에 서사를 관통한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이동한 무언가의 흐름을 함께 겪었기 떄문이다.
그런데 쇼츠는 흐름을 소거한다. 서사는 해프닝이 된다. 해프닝은 이어질 수 있다. 전의 해프닝과 후의 해프닝이 어떤 인과 관계를 가지지 않더라도 괜찮다. 서서히 고조되거나 몰입되지 않아도 괜찮다. 몰입하지 못하면 다음 영상을 보면 된다. 하나의 의미로 이어지기보다 낱낱이 흩어지는 영상 속에는 감각적인 즐거움만이 살 길이다. 내가 끝까지 머물며 본 쇼츠는 단 1분을 보지 않고 넘겨버린 쇼츠보다 가치있고, 이것이 해프닝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된다. 개인화 혹은 맞춤이라고 불리는 큐레이션이다. 철저히 나의 감각이, 나의 생각이 아닌 몸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지능화된 플랫폼들은 새로운 해프닝을 담은 쇼츠를 던져준다. 알고리즘이 만드는 서사 아닌 서사. 너무 짧기 때문에 완결되지 못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해프닝들을 목도한다.
#피드_feed
길이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쇼츠의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 피드(Feed)의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피드는 ‘먹이를 주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먹이를 찾아 손질하고 요리하고 음미하며 먹는 것이 아닌, 준비된 먹이를 주면 넙죽 받아먹도록 하는 것. 시작은 뉴스피드(News feed)였고,이제는 당연한 환경이 되었지만 엄청난 반발과 함께 등장했다. 2006년,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새로운 디자인을 소개하면서.
원래 페이스북은 그 이름 그대로 여러 사람들의 프로필을 묶어 둔 서비스였다. 우리의 사이월드가 그러하였듯이, 내 지인의 프로필을 찾아가면 그들의 게시물을 볼 수 있게 만들어두었다. 마치 나무의 줄기를 찾아가 그 줄기에 달린 꽃과 잎을 찾는 것처럼, 인터넷 상의 콘텐츠들은 계열을 따라 분류되고 묶이고 단계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런 정보 구조는 흔히 메뉴트리(menu tree)라고 불렸다. 당시의 콘텐츠 제공 디자인 방식을 대표하는 것은 ‘게시판’이다. 게시판의 성격을 분류한 타이틀을 찾아 ‘들어가면’ 게시물들이 걸린 목록을 만나고, 그 목록 중 한 편을 골라 ‘들어가면’ 비로소 한 편의 글, 한 장의 사진, 한 편의 영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게시물들이 차고 또 넘치면, 현실 세계의 게시판과 달리 여러 게시판들을 마치 책의 ‘페이지’처럼 이어지게 한다. 게시물의 제목들로만 이루어진 페이지는 목록의 하단에 숫자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페이지가 다른 색깔로, 볼드체로 보여졌다.
이런 복잡한 장치들은 정보에 닿기 까지의 거리를 늘려두고 그리로 가는 ‘경로’를 인지하게 만든다. 마치 공간 속을 이동하는 것처럼 맞는 주소를 찾아가고, 맞는 건물을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 곳에서 내가 찾는 방을 찾아 ‘들어가면’ 비로소 만나야할 누군가를 대면하게 되는 것처럼. 사용자의 인지 구조 속에는 연역적인 지도가 그려진다. 최종의 정보까지 깊이와 흐름이 생긴다. 어떤 게시물을 만나더라도 사용자는 생각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맞을까? 나는 여기 왜 왔을까?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지금 얼마만큼 왔나?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았나? 여기서 멈추면 될까? 옆 방 문을 두드려야 할까?
마크 주커버그에게는 이 모든 경로가 비효율로 여겨졌다. “최적의 맞춤형 신문(The most personalized newspaper)”을 제공하겠다는 마크 주커버그의 소개는 이 디자인의 변경이 ‘신문’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신문은 책과 달리 목차와 분류를 따라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다. 커다란 평면에 나열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정보들을 모으는 방식이다. 얻는 것은 한 눈에 모든 것을 훑어볼 수 있는(at a glance) 정보의 접근성이고 잃는 것은 깊이와 흐름, 일관성이다. ‘책’을 모델로 두던 정보 구조는 ‘신문’으로 바뀌면서 수직적으로 깊게 들어가는 정보 탐색 과정은 평면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다만 현실 세계의 신문이 ‘페이지’라는 문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온라인 세계의 ‘뉴스피드’는 문턱없이, 걸림없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의 첫 반응은 좋지 않았다. 정연하게 정돈된 친구들의 방을 유람하다가 갑자기 내 방에 들이닥친 벽보들의 홍수를 맞이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벽보들의 홍수 속에는 내가 궁금하던 친구들의 소식 뿐 아니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헤어진 애인의 근황이나 페이스북이 장사를 위해 흘려둔 광고들이 망설임없이 섞였다. 지저분해진 ‘내 공간’에 대해 질겁한 사용자들이 반발하자 페이스북은 이전 방식으로 되돌리고 새로운 디자인을 철회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발견했다. 반발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더 많은 시간을 페이스북에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독의 시작이다. 결국 그들은 ‘지저분한’ 벽보를 조금 정리하는 선에서 디자인을 개선한 뒤, 뉴스피드 방식을 고수했고 이느 곧 페이스북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드 방식의 디자인은 거의 모든 SNS의 표준이 되었고, 거의 모든 정보 제공의 방식이 되었다.
분류의 논리와 깊이의 경로를 삭제한 채 모든 것이 넓고 끝없는 평면 위에 널렸다. 이제 연역적인 접근 방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바야흐로 귀납의 시대, 객체 지향(object-oriented)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대의 살 길은 탐색이 아니라 필터링이다. 경로가 아니라 알고리즘이다. 큐레이션이라는 근사하고 세련된 이름은 나의 행동이 여기 저기 뿌리는 데이터들을 주워서 가치의 무게를 평가한다. 오래 머무른 곳, 얼른 나가버린 곳, 머무르다 ‘좋아요’를 누른 곳, 심지어 댓글을 쓴 곳, 한 번 더 반복해서 본 곳.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새로울 수 없다. 내 옷장에 걸린 스타일의 옷을 또 한 벌 사서 걸어두는 것과 같은 행동이 반복된다. 변신, 변화는 멀어진다.
#끌어올리기_swipe
무한한 평면이라면, 계단도 문턱도 없다면, 힘들여 뚜벅뚜벅 걸어다니며 천천히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을까? 문턱이 없는 넓은 공간은 바퀴가 달린 이동 방식이 알맞다. 컴퓨터 마우스에 달린 바퀴(wheel)를 굴리면 스크롤이 된다. 컴퓨터의 보급보다 더욱 강력해진 모바일폰은 뛰어난 터치 스크린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끌어올리면 내가 바퀴를 타고 지나가듯이 화면이 지나간다. 스와이프(Swipe)라고 불리는 이 조절 방식의 확산은 검은 터틀넥의 영웅, 스티브 잡스의 작품이다. 2007년, 그가 손에 들고 나타난, 키패드가 달리지 않은 터치스크린의 핸드폰,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다.
아이폰 이전에 ‘터치스크린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기기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터치스크린 핸드폰은 ‘감압식 터치’라는 방식을 채용하여 별도의 스타일러스 펜으로 콕콕 찍어서 사용해야 했고, 스마트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OS인 윈도우즈 방식은 성공한 컴퓨터 OS를 다만 작은 화면에 구겨서 넣어두었다. 작은 화면에 마우스 없이 조그만 펜으로 조작해야 하는 터치 스크린 스마트폰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업무를 위해 컴퓨터 대신 폰을 휴대해야 했던 일부 사용자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에게는 전혀 매력이 없는 기기였다. 그런데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터치 스크린’을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새롭게 세워진다.
아이폰 1세대가 탑재한 터치스크린은 세계 최초의 ‘정전식 멀티 터치 스크린’이었는데 이 복잡하고 기술적인 용어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제 스타일러스 펜은 필요없어졌고, 손가락 여러 개를 누르거나 문지를 수 있으며, 그 민감도와 완성도가 대단해졌다는 뜻이다. 완성도라는 대목을 조금 설명하자면,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가상의 디지털 세계로 옮겨오는 작업을 수준 높게 구현했다는 의미다.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이라 불리는 아이오에스(iOS)의 디자인 테마는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현실의 사물들을 모방하여 디지털 세계의 그래픽으로 옮기는 방식이었다. 메모 앱이 노란 줄의 옥스포드 메모 패드를 닮게 디자인된 것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더불어 그래픽이 움직이는 모션 디자인이나 촉각으로 느껴지는 햅틱(haptic) 디자인 역시 현실 세계의 것들을 모방했다. 두 손으로 화면을 늘리면 사진이 커졌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올리면 가속도와 함께 ‘드르르륵’거리는 촉감을 주면서 화면이 미끄러져 올라갔다. 이를 스와이프(swipe)라고 불렀다.
이 혁신적이고 놀라운 디자인의 변혁 앞에 사람들이 매혹된 것은 중독적인 감각 경험이었다. 모두가 잊고 있지만, 그 전의 모바일 기기가 화면을 스크롤하는 방식은 컴퓨터 화면의 ‘스크롤바’와 같은 도구를 스타일러스 펜으로 조작하는, 매우 귀찮고 정확도 떨어지는 노동이거나 5방향키(상하좌우와 중앙의 확인 키)를 통해 기계적으로 분절된 만큼의 정보를 이동하는 지루한 반복 작업이었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이 요물의 스와이프는 내 손가락을 따라 화면이 위로 또 아래로, 크게 또 작게 움직였고, 달그락거리며 감겼고, 챠르르르 예쁜 화면들이 회전목마처럼 지나가다가 느릿느릿 멈추었다. 스와이프는 곧 사람들의 손장난을 부르는 루틴이 되었다. 피젯스피너를 끝도 없이 돌리거나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는 것처럼, 하다 못해 볼펜을 딸깍거리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중독적으로 화면을 스쳐 지나가며 기뻐했다. 뚜벅이에게 바퀴달린 이동 장치가 생긴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이동 장치는 성능이 좋을 뿐 아니라 타기에 재미있었다.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기 위해 갈 때도 있지만 일 없이 여기 저기 미끄러지며 놀 때가 많았다.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광장은 넓었고, 걸리적거리는 문턱은 없었으니까.
#위치_orientation
정확한 주소지의 건물에서 내가 찾아 가는 방에 다다르기까지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가는 곳으로 향하는 지도와 현재 나의 위치일 것이다. 이 위치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때에도 필요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채로 여기 저기 헤매고 있을 때에도 유용하다. 내가 어디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방들을 둘러보았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아, 내가 지금 ‘3번 메뉴’의 게시판에 5페이지에 있고 그 중에 2번째 게시물을 보았구나.” 순식간에 이런 나의 위치 파악을 돕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다. 상단에는 상위 메뉴들을 오갈 수 있는 메뉴 바가 있을 것이고 좌측에는 그 중에 내가 선택한 ‘3번 메뉴’의 타이틀과 그 아래 하위 메뉴들이 열려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내가 선택한 게시판이 다른 색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고 게시판의 목록들은 내가 이미 보았던 게시물과 보지 않은 게시물을 선별하여 진하게 혹은 흐리게 보여줄 것이다. 게시판 목록의 하단에는 조그만 숫자들을 통해 이 게시판이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갖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그 중 내가 머물고 있는 페이지는 또한 다른 색이나 두께로 두드러지게 보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두꺼운 책을 읽을 때 책 가름끈을 두는 것과 비슷하다. 정확한 위치를 호명하지 않더라도, 책의 앞에는 목차가 있음을 알고 있고, 눈에 보이는 두께와 손으로 느끼는 무게로 책의 정보량을 가늠할 수 있으며, 책 가름끈의 위치로 내가 현재 보고 있는 정보의 위치를 직관적으로 알게되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끝없는 광야에서 바퀴를 달고 이동하는 나에게는 목적지와 경로가 사라진다. 따라서 나의 위치도 알 필요가 없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내 앞에 닥친 장면이고, 그 장면의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고 더 머무를지 그냥 지나칠지를 빠르게 판단하는 일이다. 끝이 없으므로 얼마나 왔는지 알 필요가 없고 문턱이 없으므로 얼마나 많은 공간을 지나쳤는지 알 도리가 없다. 미끄러져가거나 멈추거나.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다. 다만 피드 목록을 당겼다 놓음으로써 아직 미처 보이지 않는 정보를 서둘러 로딩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는지, 얼마나 의미 있게 나에게 쓰일 것인지를 숙고할 여유는 많지 않다. ‘좋아요’나 ‘하트’를 누르면 나는 그 정보를 충분히 즐긴 기분이 든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십대로 돌아가 속도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군중과 마주치면 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미국의 선거 시즌에 쏟아지는 정치 포스트들이 확산되었던 것처럼,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재난 소식이 실시간으로 세세하게 알려지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스쳐간 만남의 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았다. 이 규모가 무언가를 해내기도 한다. 2015년 네팔에 지진이 나자 77만명의 사용자들이 빠르게 모금하여 구호 단체에 성금을 전달했다.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을 때 SNS 프로필에는 노란 리본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2019년 뉴질랜드의 모스크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을 테러범이 송출하는 실시간 영상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보아야했고 선거철에 인공지능으로 조작된 가짜뉴스들을 만나야했다. 거대한 규모로 쏟아지는 콘텐츠 앞에서 수동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사용자는 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얻은것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효율이다. 정보를 접하는 효율. 접근하는 속도, 소비하는 분량에 있어 최고의 효율을 보였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은 이 효율을 중하게 여긴다. 사용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머무르는지에 따라 광고 가격이 매겨지고 기술력 좋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적중률 높은 광고를 제공할 수 있게 되어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러고보면 새로운 산업을 얻었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았지만 영리한 사업모델을 발명하여 수익을 창출했다.
그리고 사용자들의 시간을 얻었다. 양으로 승부하고 속도로 밀어부치고 감각적 쾌락으로 중독시켰다. 책은 책끼리, 영화는 영화끼리, 게임은 게임끼리 경쟁하던 시절은 막을 내렸고 모든 콘텐츠는 제한적인 사람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경쟁의 승자는 귀여운 고양이이고, 경이롭게 많은 음식을 먹어 치우는 유튜버이고, 세련되면서도 위트있게 춤추는 인플루언서다.
#잃은것
잃은 것은 효율의 목적이다. 목적까지 다다르는 방식이다. 느린 관찰과 경청이다. 정보를 구조화하고 의미화하는 능력이다. 지루하게 토론하고 집요하게 사고하는 방식이다. 이 방, 저 방 기웃거리지 않고 단 한 명과 대면하여 차를 나누는 시간의 깊은 경험이다. 그리고 내 생가의 좌표다. 러닝 머신 위의 운동처럼, 계속해서 달렸지만 한 뼘도 이동하지 않았다.